마음 먹고 찾아간 야쿠인의 빈티지 소품 가게에는 생각보다 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 없다. 게다가 가격표를 들여다 보면 절로 눈살이 찌뿌려진다. 5분 만에 가게를 나와 우리는 고코쿠 신사 방면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걷고 또 걸어서 다리가 벌써 저려 왔지만, 이런! 버스를 타기 애매한 장소다. 걸으면 15분, 버스를 타면 20분이란다.


지름길로 선택한 아카사카의 골목 풍경은 후쿠오카의 여느 동네와는 좀 다른 분위기다. 정돈되고 세련된 집들, 제법 넓은 마당에 주차된 빈티지 자동차들, 온기가 느껴지는 가게들. '입주 모집' 깃발이 흔들리는 멘션을 보니 여기에 터를 잡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겨울인데도 나뭇잎이 파릇파릇한 이곳의 온화한 겨울날씨도 내 마음을 잡아끈다. 서울은 영하 10도의 강추위라던데... 


문 앞에 심겨진 호랑가시나무



이렇게 집과 가게를 구경하느라 15분 거리가 1시간 거리가 된 끝에 드디어 '숯불 로스터리 코히 히이라기(이하, 히이라기)' 앞에 선다. 문 양편에 심어놓은 호랑가시나무가 간판을 대신하는 곳. 그래서 이 깃샤텐의 이름이 호랑가시나무를 뜻하는 '히이라기'이다.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우리를 마스터는 약간 못마땅한 눈으로 내다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마스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숯처럼 짙은 나무색의 인테리어가 구수한 커피향을 은은하게 뿜어낸다. 카운터 위에 걸린 수십 개의 커피잔들이 자신을 '지명'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래된 오디에서 흘러나오는 바로크 음악. 마스터가 항상 고집하는 장르라 지겨울 법한 대도 주전자에서 나오는 하얀 김은 그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춤을 추며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로열 코펜하겐의 연도별 접시들이 줄지어 선반과 벽을 장식한다(내게도 내 출생년에 나온 접시가 하나 있다).


다양한 커피잔들이 선택을 기다린다



마스터, 코야마 모토나리 씨는 아까는 못마땅해 하던 얼굴을 황급히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관광객이구나, 하는 표정이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바에 앉아 담배를 피며 신문을 읽는 사람이 한 둘은 있어야 한다는 게 깃샤텐의 암묵적인 규율인지 모르겠으나, 히이라기에서 이 시간에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야나기 씨(가명)다.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신문에 코를 박고 이따금 담배를 무는 그는 아마도 어젯밤 파친코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으리라. 면도를 못한 얼굴엔 가벼운 수심과 오늘밤의 일전을 기다리는 결의가 느껴진다.


히이라기의 브란도 코히를 주문한다. 깃샤텐에서는 웬만하면 브란도 코히를 마셔줘야 한다. 900엔이란 가격은 다른 깃샤텐에 비해 비싸게 느껴지지만, 이곳의 품격 있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값어치다. 주문을 받자 마스터는 위를 가리키며 마음에 드는 커피잔을 고르라고 일러준다. 수십 개의 커피잔들이 숨을 죽이며 내 손짓을 기다린다. 그들의 애잔하면서 고운 자태가 내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그린색 무늬가 둘러진 커피잔을 힘겨이 고르니 나머지 커피잔들은 차가운 소리를 내며 내게서 고개를 돌린다. 일사불란한 냉정함이다.




소매를 걷어붙인 마스터는 절도 있게 커피잔을 내려 뜨거운 물로 데우고는 커피콩을 갈아 드리퍼 위 하얀 종이필터에 신속히 안착시킨다. 그 동작이 제비처럼 빠르고 박력마저 느껴지는 터라 자칫 방심하면 사진 찍을 찰나를 놓치겠다 싶다. 주전자의 긴 주둥이를 놀리며 커피를 내리는 마스터의 눈빛에는 한 알갱이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서려있다. 야나기 씨에겐 결코 없을 법한 사무라이의 다짐이 흰 셔츠를 입은 마스터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난다.


빛이 나갈 듯 강렬한 눈및



내가 고른 잔에 얌전히 담긴 커피에서는 숯불 냄새가 난다. 잔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액체는 혀를 지나 목으로 넘어가는 동안 진한 나무향의 발자국을 남기는 커피는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려 언젠가 그리워 할 기억을 내게 새겨 놓는다. 쓰면서도 달콤하고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커피의 질감은 곁들인 말차 케이크로도 결코 지울 수 없다. 날카로운 키스가 바로 이런 느낌일까? 호랑가시처럼 뾰족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는 언제 어디서라도 마음에 깊이 패이리라. 언제나 그리우리라.


내가 고른 커피잔


말차 케이크



가게 내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여러 개의 유리잔이 걸려 있는 나무 선반이다. 이 유리잔은 드립된 커피를 받아내는 용도로 쓰이는데, 마스터는 손님의 고른 커피잔에 커피를 옮긴 다음 유리잔을 씻어 나무 선반의 고리에 툭 하고 걸어 놓는다. 워낙 절도 있게 움직이는 마스터이다 보니 잔을 거는 수십 년 간의 동작이 고리 주위의 나무를 조금씩 닳게 하여 움푹 패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후쿠오카 카페 산책>을 쓴 코사카 아키코는 그 움푹 패인 곳을 이곳의 명소로 꼽았는데, 직접 눈으로 현장을 목격하니 감격스럽기 그지 없다.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 아닐까? 수십 년의 기억과 수많은 손님들의 자취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화석이다. 


나무판이 패인 자국



여느 깃샤텐과는 달리 샌드위치나 나폴리탄 같은 음식은 없었지만, 커피 한 잔으로도 마음이 배부른 곳. 떠나는 것이 아쉬워 우리는 커피빈 100그램을 따로 주문한다(더 주문할 걸 아쉬움이 남는다). 아키코의 책을 들이밀며 싸인도 부탁한다. 야나기 상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새로 산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마스터에게 보여주려다 방해꾼의 습격을 받고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응원한다 오, 좋은 차로군요. 야냐기 상, 오늘밤엔 아무쪼록 간바레! 


책에 받은 마스터의 싸인


야나기 씨와 이야기하는 마스터



손으로 정성껏 써준 영수증을 받아 쥐고 문을 나서니 아까부터 토라져 있던 커피잔들이 이제는 댕글거리며 작별인사를 한다. 커피잔들의 아련한 미소를 돌아보니 호랑가시나무 위로 차곡차곡 내려 앉은 후쿠오카의 겨울이 이보다 사랑스러울 수 없다. 이제는 걷지 말고 버스를 타야지, 하며 우리는 오호리 공원으로 다시 '걸어가 버린다'.